이영문-인 어 베러 월드(In the better world, 덴마크 2011)

몇 달 만에 글을 씁니다.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세상살이에 대한 나름의 예측이 빗나가기 시작했고, 주변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미 달라져 있는 것을 제가 애써 외면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와 함께 체념이 양가감정으로 남게 되었지요. 용서라는 추상적 단어는 그리 쉽게 마음속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즈음에, 슬그머니 세상에 대한 연민이 들풀처럼 고개를 듭니다. 결국 인간의 미움과 복수와 폭력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드릴 이야기는 개인과 사회에 가해지는 폭력이 아무리 가혹해도 인간은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구도적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인 어 베러 월드(In the better world, 2010)’입니다. 덴마크 내에서 개봉될 때, 원제목이 '복수‘인 것을 보면, 수잔 비에르 감독이 그리고자 했던 영상세계는 아마도 폭력과 복수에 대한 인간의 용서와 화해였을 겁니다. 잠시 영화를 들여다 봅니다.

아프리카 난민촌에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닮은 의사 안톤이 있습니다. 숭고한 사명의식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에서 19세기 구한말 광혜원의 알렌이나 세브란스병원의 에비슨이 연상됩니다. 카메라는 다시 한적한 덴마크의 초등학교를 비춥니다. 엘리어스라는 남자애가 매일 동료들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갓 전학 온 크리스티앙이라는 소년이 이를 지켜 주려다 똑같이 집단폭력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야무진 크리스티앙의 얼굴에 겉잡을 수 없는 분노가 지나가면서, 그는 자기 얼굴만큼 커다란 칼을 가해자들에게 들이댑니다. 반항할 수조차 없게 무자비한 폭력으로 자신과 엘리어스에게 가해진 폭력을 되돌려 주는 크리스티앙의 모습 위로 다시 아프리카의 슈바이처 안톤이 겹쳐집니다. 사실 크리스티앙이 아닌 힘없는 피해자 엘리어스가 안톤의 아들입니다. 이들 부자는 가끔 만나고 교감하지만, 안톤은 아들의 피해 사실을 모릅니다. 오히려 동네 건달 정비사에게 안톤 또한 작은 폭력과 함께 깊은 모욕을 당합니다.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고 비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안톤을 비웃는 것은 정비사만이 아닙니다. 아들 친구 크리스티앙 또한 안톤의 해결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어리지만 냉혹한 크리스티앙의 결연한 얼굴에서 우리는 더 구체적인 해답을 찾을 지도 모릅니다. 마음속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호수물에 뛰어 드는 안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저는 체념을 읽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폭력의 철저한 독립성과 무연관성을 외치는 인간의 모순된 감정을 읽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아내와의 화해가 이루어지지만, 결국 아프리카 난민촌을 찾아온 살인범을 인도적으로 치료하다가 분노를 폭발시키는 안톤의 모습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의 인과관계를 연결시키며, 엘리어스의 희생을 바탕으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착한 드라마로 귀결되는 듯이 보입니다.

몇 가지 해결되지 않는 영화 내부의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아프리카 난민촌에 가해지는 폭력과 덴마크 작은 학교에서 행해지는 폭력을 물리적인 측면에서 균등하게 다루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저개발 아프리카 대륙의 폭력은 덴마크 등의 제국주의적 국가폭력의 결과물이라는 시각입니다. 적어도 국가와 개인의 폭력이 강한 유대관계를 가진다는 전제하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폭력은 난민의 지위권 교부부터 시작해, 유럽 열강들의 식민통치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입니다. 또 다른 모순은 덴마크 작은 마을에 내재된 일상의 폭력에 대한 해결방식에서 안톤이 강조하는 비폭력적 대응이 동화처럼 비춰진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장면들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앙의 대응이 극단적인 위험으로 간주되는 것 또한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제 나름의 결론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저는 이 사회가 구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미세한 구도로 대립시킨 것에 주목합니다. 폭력에 대항하는 힘과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 아이와 어른의 대응방식. 선과 악의 극명한 이분법 구도. 그리고 복수와 용서. 이 세상은 너무나 약한 고리로 인간들을 느슨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돈 그 자체에서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희망 찾아 가기’라든가 ‘인간 본연의 순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고리의 연장선상에 우리가 있을 뿐입니다. 매일 가해지는 폭력에 대항하고 한편으로 분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용서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이 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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